낭만 IT] 인터넷 종량제, 미터기 올라가는 소리
외국에 나가 있는 지인에게 메신저로 큼지막한 파일을 하나 건냈다. 그런데 그는 수락을 거절했다. 종량제라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인터넷으로 멀티미디어 파일을 볼 엄두도 못내며, 주로 문자 위주의 네트워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사진 몇 장조차 망설이며 받아야 하는 그의 인터넷은, 분명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과는 꽤나 다른 것이었다.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지내듯 우리에게는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인터넷. 그러나 사실 다른 나라에서는 힘겹게 얻어야 하는 소중한 재화였음을 새삼 느끼고 만다. IT 강국이라 세계가 칭송하여 부러워 마지않는 한국의 IT 인프라, 그 중심에는 대다수의 가정에서 큰 부담 없이 마음껏 쓸 수 있는 초고속 인터넷망이 있다.
초고속망에는 공공재의 보편성이 엿보인다. 굳이 e-Korea 이래 정부 시책과 정책 전략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단 몇 명의 사용자를 위해서 고가의 설비를 마련, 방방곡곡을 이어 나간 무모함은 분명 시장논리에 앞섰다.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닌 “The Most Wired Country”로 기억시킨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할 저돌성이 여기에 있었다.
“서울에 가지 않아도 학원에 가지 않아도 배움의 길은 같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했다는 그 자신감의 CF 한편. 섬마을에 있던, 도심 8학군에 있던 같은 교육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이 뿌듯함은 우리 사회에 녹아 있는 초고속망의 공공성을 강하게 반영한다. 인터넷은 우리에게 전기와 수도만큼이나 보편적인 공공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공공재를 둘러싼 시끌벅적함이 심상치 않다. 이제 인터넷에도 전기나 수도처럼 계량기를 달아야 한다는 주장이 시작되었다. 바로 인터넷 종량제 소동이다. 이 소동은 경제학의 어떤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마을 어귀에 소를 방목하기 위한 모두의 목초지가 있었다. 평화롭던 이 고장은 방목하는 소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생긴다. 풀을 먹어 치우는 소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풀이 자라는 속도가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농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소들을 먹이고, 이 목초지는 점점 황폐해진다.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높이려는 농부들의 욕심 앞에 목초지의 황폐화는 시간문제다.
사용자가 얼마 없을 때는 무한해 보이던 공유지도 몰려드는 사용자 앞에서는 비좁아 진다. 각 개인의 합리적인 이윤 추구는 결국 공유지 전체에 대한 파국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합리성은 사회의 합리성과 어긋나기 쉬울 수밖에 없음을 피력한 하딘(Garrett Hardin)의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이다.
홈페이지 몇 장 보고 잠자리에 들던 사용자들이 있던 시대가 가고, 전국민이 블로깅에 싸이질로 네트워크를 매워가며 영화를 밤새 다운받는 시대가 되었다. 한정된 대역폭은 목초지처럼 줄어든다. 즉, 공공재의 비극이 인터넷의 목초지에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기를 물 쓰듯, 물을 공기 마시듯 써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인터넷에도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딘은 세금, 이민 억제 등과 같은 방안을 제시한다. 종량제로 부담을 지우고 P2P 사용자를 소외시키려는 시도는 하딘의 해법 그대로다. 인터넷 종량제와 하딘의 해법은 모두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이기심을 제한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편리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통제였고, 그 상징은 바로 ‘미터기’다. 집집마다 볼품없는 계량기가 달리게 된 바로 그 이유가, 인터넷 종량제의 이유가 된다. 공공재의 희소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억제책, 종량제는 이 논리에 업히고픈 것이다.
그럼 우리는 선진 시민답게 이와 같은 강제를 사회적 필요성으로 수용해야만 할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초고속망이 농부들의 목초지와, 그리고 전기나 수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인터넷은 현실 자원에의 의존도가 비교적 낮다. 목초지나 전기, 수도의 낭비는 천연자원의 낭비와 직결된다. 남이 나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구성원들은 통제의 사회적 필요를 자연스레 인식한다. 결국은 모자랄 수밖에 없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초고속망에서 모자라게 되는 것은 지구의 자원이 아닌, 자본 투하와 기술 혁신에 의해 ‘증식 가능한 인위적 자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희소성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가 아니라, 희소성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일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이 빚어내는 가상공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무엇이든 이루질 수 있는 목초지를 마련한다. 더 빠른 전송 네트워크, 더 효율적인 라우팅, 더 풍부한 IP, 무책임한 점유를 소외시킬 QoS 솔루션 등등……
기술의 힘과 경영의 묘에 의해 우리의 공유지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이 가능성은 테크놀로지 회사들의 비전인 동시에 책임이 된다. 이들이 본연에 충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목초지는 몰지각한 먹보보다 빨리 팽창할 희망을 지닌다.
일어나지 않은 비극에 대비하기에는 이 목초지에서의 자유는 너무나 절실하다. 계량기의 존재는 심리와 행동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택시의 미터기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듯, 우리는 초조함속에서 종량제 네트워크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초고속망 덕분에 ‘Always On’, 즉 ‘언제나 네트워크 속’이라는 발상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몸에 익혔다. 지금은 움츠릴 때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피워야 할 때다. 그런데 다른 나라가 ‘無限上網’이라며 이제 따라잡기 시작한 우리의 정액제 인터넷을 이제 와서 등지기는 뼈저리게 안타깝다.
어떤 나라는 거꾸로 가는 종량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정액 요금이 부담되는 이들을 위한 기본 요금 만원 미만의 종량제, 요금의 최대 상한은 정액제 수준, 약 3만원”. 일본에 실제로 있는 상품이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로 하나 되는 나라. 한국은 지금 그렇게도 외국이 부러워하던 바로 그 인프라를 발판으로 유비쿼터스 사회를 향해 도약하려 하고 있다. 미터기를 꺾고 내달리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원문: http://zdnet.co.kr/news/column/goodhyun/0,39026073,39135001,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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